여가/문장

지금

무말랭이 2022. 4. 18. 22:27

(펌)

 

인생에 대한 매우 흔한 착각 중 하나에는,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감각들이 미래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을 나중에도 느낄 거라 믿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나중에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 혹은 지금 내가 가진 욕망이나 열망이 미래에도 그대로 있을 거라 믿거나, 지금 나에게 익숙하거나 능숙한 것이 미래에도 그럴 거라 믿는 것. 그런 믿음은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져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게 사실 쉽지 않다. 

나는 만약 내가 과거에 해냈던 것들을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그 중 상당수는 하지 못할 거라 느낀다. 과거에 썼던 책들이나 소설들을, 그 정도 열정과 의지로, 뚝딱 한권 만들어낼 자신이 그때만큼 없다. 상황이 여러모로 변한 게 한몫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마음의 흐름이나 내면의 조건 같은 것도 많이 달라져 버려서, 그 시절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신 조금 다른 힘이나 다른 능숙함을 갖고 있을 뿐이어서, 그때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시절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의 것만으로 끝났다.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한들, 그 시절과 같은, 그 시절의 방식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 시절 할 수 있었던 사랑은 그 시절로 끝이 난 것이고, 내게는 그 이후 차곡차곡 쌓여온 더 많은 경험, 내면, 무의식, 기억, 현실의 조건 같은 것들이 얽혀서, 이제는 다른 방식의 사랑 밖에 할 수 없다. 그 시절처럼 달 밝은 날 눈내리는 새벽에 뛰쳐나간다 한들, 그 시절의 마음으로 그 밤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 시절 사랑했던 음악을 들어도, 그 시절만큼 그 음악을 사랑할 수는 없다. 대신 그와는 다른 것들을, 조금 다르게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 지금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시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지금 할 수 있는 걸 가능한 한 필사적으로 하라는 신호가 되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또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많은 것들은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느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해낼 수 없는, 그저 과거의 일이 된다. 그러므로 할 수 있을 때 한다는 것은 아마 최선의 삶을 살아내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거나 없는지 알려면, 어느 정도의 과감함이랄 것도 필요한 듯하다. 애초에 '할 수 있었던' 것을 해보지조차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해보면 알게 된다. 내가 이걸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할 만한 의지가 이어지는지 아닌지, 그만한 열의가 마음 안에서 솟아나와 계속되는지 아닌지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역시, 이 시절은 그 '할 수 있는 것'에게 내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자신을 뽐내고, 항상 열정을 갖고 일을 해내고, 항상 멀리 떠나는 일과 고독 속의 음악을 사랑하고, 항상 고요히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고, 항상 강아지와 산책하고 돌아와 영화 보는 밤을 좋아하고, 항상 친구들과 모여 술 마시며 밤새 떠드는 날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삶의 많은 일들이 그렇게 어느 시절들의 일로 잠시 왔다가 떠나간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그저, 어느 시절들을 건너가며, 이 삶의 시간이랄 것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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