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계획한 마흔 다섯 번의 PT를 마쳤다.
작년 5월, 이사하고 여유를 찾아갈 즈음 눈 딱 감고 가격이 좀 나가는 등산화를 샀다. 그걸 신고 발에 착 붙는 착용감에 감탄하며 이른 아침마다 동네 뒷산을 올랐다. 봄부터 가을까지 천천히 체중 8kg 정도를 줄였다. 연두 빛 숲이 짙은 초록이 되고 다시 단풍이 물드는 하루하루의 변화를 처음으로 자세히 본 시간이었다.
작년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는 동안은 운동 침체기. 식단의 질을 바꾸고 술을 덜 마시는 노력은 했다. 떨쳐 내려야 잘 떨쳐지지 않던 이사 스트레스, 집 값 현타, 이제껏 뭐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좀 누그러진 시기이기도 했다. 솔직히 정신 승리까지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이런 나도 나다’ 하는 생각 정도. 스스로를 덜 괴롭히고 싶어졌다.
올해 2월 중순부터 오늘 아침까지는 일대일 PT를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아침 일곱시. 탄수화물을 먹지 않는 식단 조절을 같이 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일과를 맞춰 조정하고 아이 등교 준비를 맡아 챙긴 남편 덕분이다.
첫달은 밤마다 몸살을 앓았다. 다음 두 달은 일희일비의 시간. 하루는 근육에 힘이 붙는 거 실감하며 우쭐하고, 다음날은 중량 늘리고 빌빌 댔다. 그 시간을 지나며 다시 7.5kg 정도 줄였다. 근육은 지키고 체지방을 태웠다는 점에서 선방.
15kg 정도 체중 감량을 한 지난 12개월. 결과적으로는 코로나 첫 1.5년에 붙은 체중을, 그 다음 1.5년에 줄이며 원점복귀한 셈이지만, 이제 내려갈 것을 알면서도 산에 오르는 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나름 자축하며 의의를 꼽아 적어 둔다.
1. 급하게 안 했다. 순식간에 성공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하고 오래하자 했다. 어제 아무리 엉망이었어도 오늘 다시 하고, 지난주에 엉망진창이었어도 이번 주에 모른 척 다시 하고, 3개월을 쉬다 가도 다시 했다. 출루율을 높이고 오래하면 결국 승률이 높아진다는 야구의 교훈.
2. 돈을 써보았다. 등산화와 스포츠 웨어. PT수강료. 건강한 식단을 직접 챙기거나 혹은 남의 도움을 빌어 챙기는 데 드는 비용. 돈을 쓰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니 모든 게 한결 수월했다. 침체기가 와도 내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전문가의 해석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내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알게 되니 스스로를 덜 다그치게 되고 여유마저 생기더라.
3. ‘돈으로 산 게 무얼까’ 생각해보니, 약간의 지식, 심리적 안전 지대 혹은 지지. 그리고 같이 하는 이들의 존재 혹은 공동체더라. 이걸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긴 하다. 그러려면 관계에 정성을 쏟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비보다 어려운 것. 혹은 어렵지만 가치 있는 것.
4. 운동을 하는 데 시간을 쓴다고 일을 덜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하는 데 시간을 안 쓴다고 일을 더하는 것도 아니다. 뻔한 사실의 확인. 일에는 일의 근육이 필요하다. 둘의 훈련 방법은 상당 부분 겹치지만, 다르다.
5. 휘트니스 짐에서 기죽거나 어정쩡한 채로 헤매고 겉돌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짐에 등록하면서도 늘 좀 마뜩찮았다. 똑같은 사용료 내고 들어왔는데, 한 무리의 남성들은 제 사유공간을 누리듯이 기구 저 기구 알뜰하게 돌려가며 땀을 쏟는다. 그 땀을 여기저기 묻히기도 한다. 근데 나는 왜 고작 트레이드밀에 싸이클인가? 위축도 되고 심통도 났다. 남성 무리의 거친 숨소리 귓가에 닿거나 땀 냄새가 내 앞까지 훅 끼쳐오거나, 혹은 무리하게 중량 높이고서는 무게를 못 이겨 기구를 내팽게치듯 내려 놓는 소음을 마주하면 화도 나고 손해 보는 기분도 들었다.
6. 요즘은 남의 운동을 의식하지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지레 짐작하지도 않는다. 짐의 구석 자리를 부러 찾지도 않는다. 내가 운동하기 가장 좋은 스팟에서 내가 그날 하기로 정한 것을 하면 그만이다. 남을 의식하기에는 내 코가 석자이기도 하고, 체력이 붙고 할 수 있는 동작이 늘어나니 어쩐지 심사도 덜 꼬인다. 휘트니스 짐에서의 공간 사용과 행동 반경이 늘어난 것뿐인데 내게는 이게 은근한 성취다.
PT를 하며 체력을 좀 키우고 나면 그 다음 단계로 해보고 싶은 운동이 있었다. 종목 바꿔 계속해보기로.